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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 부산의 시작

+ 부산1407

1407년 태종 7년 부산항이 열립니다.  부산포왜관이 생기고 조선과 일본의 국제교류가 시작됩니다.

1407년 부산포 개항

1407년 태종 7년 조선은 부산포를 개방하여 일본인이 배를 정박하고 무역을 할 수 있게 허락합니다.  그후 일본의 상선이 부산을 찾고 부산포는 조선과 일본의 교류와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조선은 부산포와 제포(내이포,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왜관을 설치하여 일본인이 조선에서 살 수 있게 합니다. 1426년 세종 8년에는 염포(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를 추가로 개방했습니다.

신숙주는 1471년 성종 2년 해동제국기에 일본과 왜관을 둘러보고 기록에 남겼습니다. 그 중 하나인 동래부산포지도에는 일본인마을(왜리), 일본인관청(왜관), 조선의 관청(영청)과 동래관의 모습이 그려져있습니다.

1490년 성종 21년  부산진에 주둔한 수군이 사용할 성을 쌓습니다. 당시 부산진성은 950m 규모로 좌천역 위쪽 정공단 주변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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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 동래부산포지도 | 1471년 |  신숙주

1592년 임진왜란

1592년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 선발대가 부산에 도착하고 다음날 아침 부산진성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정발 장군을 비롯한 군사와 백성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했습니다. 

그 해 8월 이순신 장군은 해상을 장악하기 위해 결집한 일본 함선을 한산도에서 대파했습니다. 다시 10월 5일 부산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릅니다. 부산시는 이 날을 기념하여 부산시민의 날로 삼았으며, 북항재개발 지역을 지나는 도로명을 '이순신대로'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일본은 1593년 좌천역 부근 '조선 전기 부산진성'을 허물고 지금의 증산공원 지역에 증산왜성을 쌓고, 해안가에 자성대왜성을 쌓았습니다. 증산왜성을 본성 또는 모성으로 불렀고, 해안가 성을 아들성이라는 의미로 자성대라고 불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수군은 해안가에 쌓은 일본성을 개조하여 1895년까지 '조선 후기 부산진성'으로 사용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부산진성을 고니시성 등으로 불렀으며, 1944년 조선총독부는 '자성대공원'으로 지정했습니다.

2021년 래추고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과 지역 주민은 일본성에서 유래된 '자성대' 대신 '부산진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자는 '부산진성 이름찾기' 100인 릴레이를 펼쳤고 그 성과로 2023년 1월 4일 국가지명위원회는 '자성대공원'을 '부산진성공원'으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부산진순절도 | 1760년 |  변박

1678년 초량왜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0년, 1607년 일본의 요청으로 두모포에 왜관이 만들어집니다. 두모포는 지금의 부산진역 부근입니다.

1678년 용두산공원 주변에 초량왜관이 만들어지면서 두모포왜관은 고관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초량왜관에는 대마도 도주로 부터 임명을 받은 일본인 관리와 상인 등이 살았습니다. 

초량왜관 동쪽 해안가에는 배가 정박하는 선창이 있었습니다. 그림 아래에 있는 작은 산은 용미산(동산)입니다. 

 

1876년 근대개항 이후 일본은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산을 깎고 바다를 매립하여 항만을 개발합니다. 초량왜관 앞 바다를 매립하여 지금의 중앙동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세관 주변에 부두를 만들고 기차역도 만들었습니다. 초량왜관의 선창 자리는 매립되어 광복동 롯데백화점이 됐습니다.

초량왜관 북쪽에는 일본인 사신을 접대하는 연향대청이 있었고 지금의 대청동 지명의 유래가 됩니다. 왜관의 일본인을 감시하기 위한 조선 군인 초소가 복병산에 있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267년간 일본인이 살았던 초량왜관은 우리에게 돌아오고 광복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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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도 | 1783년 |  변박

1607년 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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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승구도 | 1748년 |  이성린

1607년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를 돌려받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파견됩니다.  그후 1811년까지 모두 12번에 걸쳐 조선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졌습니다.

조선통신사는 부산에 머물면서 일본으로 갈 마지막 준비를 했습니다. 1617년부터 부산진성 영가대에서 무사항해를 비는 해신제를 지냈습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과 믿음으로 통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500명 정도의 대규모 사절단으로 구성됐습니다. 조선통신사를 맞이 하기 위해 일본은 1,400여척의 배와 1만 여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했습니다. 조선통신사를 접대하기 위해 일본의 행정기구인 번(藩) 하나의 1년 경비를 소비했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 행렬은 행렬을 이끄는 정사와 부사와 함께 군관, 글쓰는 사람, 기록을 남기는 사람, 통역하는 사람, 화가, 음악가, 배에서 일하는 사람 등이 동행했으며 일본이 특별히 요청하여 말을 타고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인도 참여했습니다.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습니다.  

래추고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에서는 2021년부터 부산진성에서 어린이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 2023 래추고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부산진성탐사대 busanjin.net

  • 래추고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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